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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문

우리 안의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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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도서명 우리 안의 히틀러
저자

막스 피카르트 지음 | 김희상 옮김

출판사 우물이있는집
정가 9,000원
발행일 2005년 08월 20일
사양 310쪽 | 388g
ISBN 9788989824367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년 뒤에 나온 작품으로, 심리학과 철학의 관점에서 나치스라는 현상을 통해 나타난 인간의 본성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의사였지만 생업을 포기하고 조국 독일을 등진 채, 스위스의 외딴 산골에 살면서 탐욕에 미친 세상과 당당히 맞서 신의 사랑을 따른 저자의 고뇌와 세상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저자 : 막스 피카르트

1888년 독일 바덴 주의 쇼프하임에서 나서 1965년 스위스 테신 칸톤의 시골 마을에서 삶을 마쳤다. 본업은 의사였으며, 문화비판적 시각의 글을 많이 쓴 작가다. 대중의 시대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을 언제나 신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 했다. 치열하면서도 진지한 그의 글은 언제나 온 가슴으로 인간을 끌어안으려는 깊은 울림을 준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인간의 얼굴』, 『침묵의 세계』, 『신으로부터의 도피』 등을 꼽을 수 있다.

역자 : 김희상

성균관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독일 뭰헨의 막시밀리안대학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관념론을 연구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면서 『사자와 권력』『털』『피라미드』『한 권으로 읽는 셰익스피어』『달라이 라마의 공감』등을 번역했다.

    1. 현대인의 병든 내면을 질타하는 심리학적, 철학적 성찰

    『침묵의 세계』로 국내에 이미 널리 알려진 막스 피카르트는 이 책에서 현대인의 병든 내면에 이미 히틀러가 있다고 질타한다. 그 현대인들은 이미 신으로부터 도피했으며, 순간만을 좇으며, 일체의 연관을 상실해버렸다. 따라서 무슨 일이 닥칠지 걱정하는 사람도 없고 그저 모든 것이 일체의 맥락을 잃고 뒤죽박죽 뒤섞여 있을 따름이다. 깨달아야 할 외부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세계는 혼란에 지나지 않고 깨달아야 할 내면도 없다. 내면 역시 혼돈이며 그저 스쳐지나갈 뿐이다.
    우리는 혼란의 세상을 향한 피카르트의 깊은 성찰의 언어를 통해서 인간, 인간과 사회, 신, 신과 인간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물음과 깨달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2. 우리 안에서 히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혼돈과 고함

    히틀러는 무가치한 존재이다. 맥락이 사라져버린 이 세상에서는 히틀러 훨씬 이전에도 무가치한 존재, 하찮은 놈이 혹은 중간치에 지나지 않는 자가 절대자로 추앙받는 일이 일어났었다. 이렇게 부풀려진 존재가 바로 훗날의 아돌프 히틀러다. 속에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언제나 소리를 질러대야만 한다. 구호는 국민을 향한 고함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고함이다. 히틀러는 구호를 외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고함은 고함일 뿐, 언어가 아니다. 무는 무일뿐, 언어를 모른다. 나치스가 하는 일이라곤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것뿐이다.
    언어란 일종의 결집하는 힘이다. 한 문장에서 행위를 하는 자인 주어는 그가 행하는 모습인 보어와 결합된다. 나아가 행위는 그 행위가 일어나는 대상과 맺어진다. 한 사태에 속하는 모든 것은 언어 속에 나란히 자리한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면 사라지지만 그 말이 담고 있던 진리는 남는다. 진리는 지속적이며 사람과 사물을 끌어 모은다. 진실은 맥락과 연속성을 가진 세계를 창조한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이 망가져 있으며 언어는 파괴된다. 그러면 이제 언어는 결집의 징표, 정신의 질서, 즉 진리이기를 포기한다. 더 이상 창조적이지 않고 그저 명령만 일삼는다. 그건 휘파람이며, 명령의 고함이다. 의미를 갖지 않는 단어는 기호에 불과하다. 구호를 필요로 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다. 히틀러는 이미 일을 저질러놓고, 말하자면 이미 상대를 급습해놓고 그 뒤통수에 대고 고함을 질러댈 뿐이다.

    기억을 상실한 인간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한 교수가 피카르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인간을 고문하고 가스로 죽인 나치스를 어떻게 하면 정상적인 생활인으로 다시 인정할 수 있느냐고. 피카르트는 말했다. “인간을 죽이는 백정은 정상적인 생활로 쉽게 돌아옵니다. 뮌헨의 우체국에 가보시지요. 살인자는 창구에 태연하게 앉아 있을 겁니다. 선생님께 시가를 팔던 담배가게 주인은 어떤가요. 당신께 그리도 친절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던 호텔 지배인을 예로 들어볼까요. 만일 계산을 치르면서 실수로 50페니히를 덜 주기라도 하면, 난리가 나겠지요. 모자라는 돈을 받기 위해 최소한 15분은 선생님께 매달릴걸요. 하지만 그러다가도 다른 고객의 우는 아이를 보면 얼른 초콜릿을 한 조각 꺼내줄 겁니다. 자기 자식에게 주려고 호주머니에 감추어두었던 바로 그 초콜릿을!”
    인간을 죽이는 백정들은 정상적인 생활로 쉽게 돌아온다. 가스로 인간을 죽인 자는 다시 일상적인 직업으로 돌아온다. 그는 가스로 사람을 죽일 때, 불과 몇 주 전에 자신이 우표를 팔던 일을 잊는다. 내면이 온통 뒤죽박죽이어서 맥락이 없는 인간, 그가 바로 살인자다. 우표를 팔듯이 사람을 죽인다.

    어우러짐이 없는 인간의 내면

    인간은 이제 내면의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기계적으로 외부의 물질만을 모으려고 애쓴다. 비행기 등을 통해서 인간은 공간상으로 밀집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과는 거리가 먼 피상적이고 기계적인 것일 뿐이다. 내면을 갖지 못한 인간은 기계적인 결합만을 추구한다. 자연이 보여주는 성장에서 우리가 깨달은 것은 세상의 사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 라디오(텔레비전)는 사건을 나열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더 이상 계산하지 않는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그저 소음만이 이어질 뿐이다. 신인종은 순간과 영원을 구별할 줄 모른다.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차이도 알지 못한다. 신에 의해 보장된 세계를 버린 인간은 이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가짜 연속성을 갖는 이 세계는 신인종이 기계를 가지고 생산한 세상이다.

    혼돈의 사회는 왜 독재자를 선호하는가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독재자의 단호함을 분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불분명한 현상에는 그 자체로 분명한 현상을 만들어내어 보충하려는 성향이 숨어 있다. 독재자의 단호함 내지 날카로움은 인간의 불안한 심리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해체되어 혼란을 겪고 있는 인간은 자신이 해체되었다고 생각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구원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쓸리는 대로 이리저리 방황한다. 계속 다른 것을 넘보며 흘낏거린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뭔가 확실한 것, 단호한 것, 강한 것이다.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독재자다. 이 혼란 속에서 히틀러는 자신을 끊임없이 드러냈다. 그는 다른 맥락 없는 것들보다 눈에 잘 띈다. 사람들은 히틀러에게 익숙해진다. 이제 사람들은 히틀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줄지어 뛰어간다. 오직 출구가 하나뿐이라는 듯이.

    본질에 주목하지 않는 사회

    순간만이 존재한다면 더 이상 그 누구도 본질에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그저 있을 따름이다. 인간이 사라지는 데에도 별다른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인생은 허망하다. 히틀러가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은, 현대에는 시간도, 지속도, 시간상의 그 어떤 발전도 없다는 것이었다. 현대인의 일반적인 특징은, 무슨 일이든 당장 그 즉석에서 결정되고 해결되어야 한다는 조급함이다. 늘 시간이 없다며 조급해한다. 시간을 박탈한다는 것, 발전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즉석에서 결정이 나야 한다는 것은 독재자나 하는 짓이다. 히틀러는 오직 이 순간만을 가지고 작업했다. 인간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대화가 사라진 세상

    맥락 없는 세상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없다. 사람들은 그저 혼자 중얼거릴 뿐이다.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한마디로 사랑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독백은 사랑의 결핍이다. 시끄럽게 고함을 질러대는 것은, 혼잣말이 아닌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속이기 위해서다. 히틀러 이전부터 사람들 사이의 대화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각자 저마다의 주장만 되풀이 했을 뿐, 누구도 상대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히틀러는 이 독백을 더욱 추켜세웠던 것이다. 그의 연설은 혼잣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아름답든지 추하든지에 상관없이 사람들을 압도했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의 철학자 비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백성이 그 소시민의 일상을 살아가며 썩어가는 가장 고결한 방식이다. 인간은 동물처럼 자신의 욕구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야생동물처럼 지극히 예민한가 하면, 터무니없이 우쭐대기 일쑤다. 머리만 만져주면 미친 듯 뛰어올라 야단법석을 떤다. 다수가 모이게 되면 끔찍한 야수로 돌변한다. 그리고 이 동물들은 저마다 처절하게 외롭다. 오로지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욕심뿐이다. 뜻이 맞는 짝도 도저히 찾을 수 없다. 저마다 내키는 대로, 자신의 기분에만 충실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반유대주의에 대하여

    반유대주의는 인류가 근세기에 얼마나 몰락했는가를 보여주는 증표이다. 중세나 3백여 년 전에도 유대인은 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리스도를 적대시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더 한층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신학적 근거에서 인종적 차별에 근거를 두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반유대주의는 그들이 저급한 종족이니 몰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이전 시기에 유대인은 ‘인간’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인종차별을 내세우는 반유대주의는 그들의 머리통이 어떻게 생겼는지, 머리털의 색깔이 어땠는지, 코는 어떤 각도로 휘었는지를 주목했다. 유대인의 옷가게 진열장의 마네킹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곧 좁은 철장 안에 가두고 인간 자체를 몇 개의 부위로 분할하고는 컴퍼스와 자로 재는 것을 넘어 온갖 살인도구로 인간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문제는 나치스가 유대인을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데는 그 어떤 근본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내용이 있어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나치스에 유대인은 구호일 따름이었다. 만약 유대인이 없었다면 나치스는 다른 종족을 적으로 선언했을 것이다. 누구든 적으로 삼아 씨를 말리려 했을 것이다.


    3. 독재자는 대중의 것이다

    대중과 독재자

    모든 것을 집어삼킨 단 한 사람, 확고하고도 결연한 독재자는 저 애매모한 대중과 딱 맞아떨어졌다. 대중 없이 독재자가 생길 수는 없다. 독재자는 대중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대중은 독재자를 통해 비명을 외친다. 이제 개인은 더 이상 하릴없이 떠돌지 않고 혼란이 의미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맥락없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아돌프 히틀러가 그건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으니까. 히틀러가 대중이었고, 대중이 히틀러였다. 그래서 독재자만 제거한다고 해서 아무 소용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은 치유가 아니다. 독재자와 맞아 떨어졌던 대중은, 그들이 맥락을 잃고 오늘날처럼 혼란 속을 헤매는 한, 또다른 독재자를 만들어낸다. 히틀러가 그들을 보살핀 그대로, 자신들을 보살펴줄 독재자를.

    나치스가 남긴 유산

    한 도시에 부부가 살았다. 그 부인은 아주 아름답고 정숙하다. 성격도 차분해서 거의 말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건달이 이 여인을 남편에게서 빼앗아버렸다. 건달은 얼마나 빨리 유부녀들을 유혹하는가에만 관심을 갖는 작자였다. 부부를 잘 아는 한 친구가 격렬한 반나치스주의자인 다른 친구에게 말했다. 그토록 정숙한 여자가 가정을 버리다니 안타깝다고. 그러자 반나치스주의자가 말했다. “여자가 너무 조용하고 비활동적이었어. 무슨 꽃나무 같았다고 할까. 그런 여자는 바람둥이에게 넘어가기 십상이지.” 그 얘기를 들은 친구가 반나치스주의자에게 말했다. “독일인도 그저 착 가라앉아서 생각에만 골몰하지. 활달하고 역동적인 히틀러 같은 인물을 그리워했을 거라고. 그래야 신이 나서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자네는 정치적으로는 독일인이 지나치게 적극적이라며 비판하는 반나치스주의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나치스와 그 나치스의 방법을 옹호하는군.”
    정치적으로 자신이 반나치스주의라고 확신하는 인물조차, 개인적으로는 나치스에게 이렇게 물들어 있다. 반나치스 정서가 격렬한 것만큼이나, 나치스는 그의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혼돈의 세상에 구원은 가능한가

    현대인은 마치 자기 자신의 본질이 혼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사물과, 다른 인간과, 자기 자신과, 그리고 신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대 어떤 파국이 닥치는지 똑똑히 보았다. 독일에서 벌어진 이 사악함을 통해 우리는 어떤 인간도, 어떤 민족도, 악이라는 기초 위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독일 이외에도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악한 요소가 이런 희대의 기념비를 세우는 데 일조했음을 고백해야 한다. 이럴 때 신이 필요하다. 인간을 진정으로 교화하기 위해 인간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며 그것이 인간을 강하게 결속시킨다. 휴머니즘은 인간을 외부로부터의, 그리고 내면으로부터의 공격을 막아주기에 충분하지 않다. 휴머니즘이라는 원칙은 너무나 애매해서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도 곧바로 적용시킬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생존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힘을 잃고 마는 것이 휴머니즘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전쟁이라는 참혹함은 휴머니즘을 산산이 짓밟는다. 사람들은 전쟁의 힘을 보고, 열광하며 휴머니즘을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인간은 확실한 내면의 일관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직한 경제와 사회라는 참된 외적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 내면의 성숙과 외적 조건이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의 건강한 삶은 든든한 뿌리를 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