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현재 위치

  1. 인문

노손병담

() 해외배송 가능

기본 정보
도서명 노손병담
저자 이창선 지음
출판사 써네스트
정가 25,000원
발행일 2022년 10월 15일
사양 592쪽 | 152*225mm
ISBN 9791190631556
장장본 위서 논쟁을 중심으로노자와 손자의 대화를 통해 손자 82편의 비밀코드를 풀다
 
<노손병담>은 위서 논쟁의 와중에 있는 <손무병법 82편> 일명 “장장본”에 숨겨진 코드를 풀려는 시도에서 쓰였다. 죽간에서 필사한 초본으로 전해진 손무병법 82편은 일명 장장본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현재 중국 손자학회로부터는 추방된 위서이다. 
문화 혁명의 마지막 물결이 휩쓸었던 1972년 4월 홍위병 난동의 와중에 산동 은작산에서 발견된 손자, 손빈 병법은 묘갱에 흩어진 죽간들을 순서도 없이 급하게 모은 것을 다시 순서를 맞춘것이다. 죽간의 배열이나 초기 예서隸書에서 현대 전승 한자로 옮겨지는 과정의 실수나 착오가 넘쳐나고 있음을 이미 저자의 전작인 <죽간손자논변>에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저자는 위서 소송으로 얼룩진 중국 내의 양측 진영 어느 쪽도 가담하지 않는다. 다만, 서적의 진위를 떠나서 “문구”에 포함한 形, 勢, 理를 파악해서 독자와 공감하고자 이 책을 썼다. 
 
 책은 장장본의 위서 논쟁에서 약점으로 알려진 도가적 색채나도교 문구에 주목한다
인문과 신화가 나선을 그리는 자리에 손자와 노자라는 두 법신을 초대했다. 이이李耳(노자)의 반전 평화 사상을 학습한 손무孫武(손자)가 피 묻은 과거를 회상하며 고뇌와 자괴감으로 후세에 전할 글을 썼다. 손무 역시 노예로 끌려온 전민戰民이었다. 전쟁에 끌려가지 않은 난쟁이 유자[侏儒]들이 옆에서 그를 도왔다. 주유들이 얇게 자른 청죽靑竹을 삶아 말리는 동안 그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글을 배운 노예들이 간편簡片을 엮어 하나의 책冊을 만들면 그는 다시 음살陰殺이 가득한 책략들을 과연 세상에 전해야 하는지 주저하고 또 주저했다. 결국 세상에 경고하고 싶은 말들로 요약한 축간縮簡을 만들고 세상에 전할 12편(또는 13편)과 집안에 깊이 비밀로 간직해 전승할 82편을 나누어 산책刪冊했다. 그러나 그의 염려대로 13편은 조조曹操에 의해 더욱 호전적으로 되어 권력자의 정치성을 옹호하고 말았다. 인민이 바라본 역사 정통에 권력자의 초조한 도통 계승의 의자는 없다. 황제의 자리가 바뀌면 세전世傳한 <병법>은 권력에 복무하고, 가전家傳한 <병법>은 계급 투쟁의 무장력으로 도교의 비술이 되었다. 13편을 종이로 옮겨 적으며 산동의 군사 천재들은 왕후장상의 주변을 돌고, 숨겨진 82편은 도교의 아이돌 신선의 손에 외단外丹의 모습으로 남았다. 땅에 금을 긋고 전쟁을 바라보면서 도사들은 “병법”이라는 싸움의 책에 부적을 붙인다. 
 
반전사상을 담은 손자의 병법 
손자는 도망친 자[孫者]였다. 손무는 그 당시 노예에서 막 벗어난 유랑객이었다. Deep State(內朝)인 고소성姑蘇城의 전쟁광들과 임치臨淄의 육식자들을 타이르고 싸움을 말리고 싶었다. 그가 쓰고 싶은 책은 군대의 해체를 논하는 “차병서次兵書”였다. 그래서 싸움에 이길 궁리로 혈안이 된 권력자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중적이었다. 모두 싸우지 말라는 충고였고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라는 고언苦言이었다. 
저자는 <손자병법>을 經의 요건인 품위(雅) 있고, 사색이 통달(達)하여, 신뢰(信)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읽어 기쁘고 즐겁다면 우리가 모두 나누어야 할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13편과 82편 모두 전傳하여진 과정의 고통과 험로를 이해하면서 더 깊은 존경과 사랑을 바치고 있다.  
 
 
저자가 밝히는 책의 내용 
책은 총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장장본의 발견과 위서 논쟁의 배경을 기술했다. 장장본의 초사본을 구해 사진을 해독하는 것이 어려웠다. iCloud에 저장된 중화권 연구가들의 사본은 약간씩 다르다. 여러 개의 사본 중 전체 맥락이 통하는 자료를 취했으나 진위를 판별할 수는 없었다.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텍스트는 손무의 맏아들 손치가 썼다는 <입언>에 보이는 단서였다. 글자 하나하나가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수수께끼와 힌트를 담고 있었다. 
2008년 여름 장장본을 평가하고 발문跋文을 쓴 중경重慶의 오송림吳松霖은 발문 수정문에서, 장장본이 위서가 아님을 강변하고 중국 손자학회를 질타하고 있다. 장장본 초본을 질서 있게 배열한 것은 오선생의 공이다. 그는 <손자병법>이 실체적 경험을 가진 역사적 인물들과 학자들에 의해 점차 발전 형성되었다고 말하며 장량張良, 한신韓信, 양복楊樸, 임굉任宏, 유향劉向, 유흠劉歆 등에 의해 다듬어졌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장장본 82편에서 13편으로 축간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특히 도교 사상이 지역 컬트(Cults)와 융합하는 시점인 3~4세기에 나타난 사회 현상을 기술하고 가전한 82편과 세전한 13편의 운명을 논했다. 축간이 진행되며 작용한 요소를 관찰함에 음양오행의 순환성과 생극生克을 도입했다. 13편으로의 성립은 갑자기 어느 한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다는 증거를 모았다.
2장에서는 사서에 기술한 손자의 일생과 여러 손 씨 계파의 족보, 장장본의 서술을 재고하여 그의 생애를 재조정한다. 중국 사서의 오류와 혼돈을 정리할 수는 없으나, 유물론적 중국 학계의 논리보다는 실증을 토대로 손자 세손世系의 혼란을 응시했다. 손무의 경험이 반영된 병법 문구를 대조하고 글자가 연변 한 까닭을 밝히면서, 손무가 “애릉 전투”의 포로였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 가설은 손무 생애의 사라진 연결 고리를 만들어 그의 실체를 복원하는 데 중요했다. 이 과정에서 손무가 활동한 오나라의 실체적 모습을 의심하고 동중국해에 침몰한 해양 제국론을 제기했다. 
장장본과 은작산 죽간과의 관계로 나타난 손빈병법 허구성의 공감은 독자의 몫이다. 손빈은 지금까지의 모습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모순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손자병법>에 보이는 그의 “생각 DNA”를 발견하면 손빈의 역사적 실체는 부인할 수 없다. <좌전>에서 추방된 그의 이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사서에서 언급된 손빈과 묘갱에서 나온 죽간의 흔적을 살피면서 20세기에 재탄생한 <손빈병법>이 왜 漢唐을 거치며 전승되지 않았는지 알게 되는 실증 자료를 장장본이 제공한다.
3장에서는 도가와 병가가 교섭하여 변화한 13편과 82편의 일부 문구를 시공을 초월한 “대화 Metaverse” 안에서 교감校勘했다. 특히 삼국시대 한중漢中에서 일어난 조조曹操와 장로張魯의 만남으로 나타난 13편의 연변과 왕필王弼의 병법에 대한 몰이해, 4세기 후반에 일어난 도교의 반란인 손은孫恩의 난을 통한 장장본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도교와 병학의 랑데부는 가전본(82편)과 세전본(13편)의 전승 의미와 방법을 뚜렷하게 말해 주었다. 많은 증거 죽간이 진시황, 태사공, 홍위병에 의해 소각되었는데, 그 빈 곳에 역사물 인벤토리를 창작하여 채운 사마천司馬遷을 위증 혐의로 소환했다. 
부록에는 “문서가설도”“장장본 서초본”원문 번역, “축간 과정 요소(3才와 5事)로 분류한 13편” “손자병법의 演流”를 넣었다


이창선
1958년 서울생. 미국과 동아시아를 오가며 동양 고전을 연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평창 여우재 고개 우거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빅베어 산에 은거한다. 간혹 댈라스나 하와이에서 보이기도 한다. 실증 역사의 관점에서 역사 기록물을 의심한다. 尊古와 疑古의 중간 어딘가에 서 있다.
주요저서: 
《한국인 탈레반》(2004), 《물속의 섬》(2009), 《竹簡孫子論變》(2015), 《韓詩內傳》(2016), 《누구에게 역사인가?》(2021) 등의 저서가 있다

    죽간 권책卷冊을 간단하게 줄이는 축간은 손무가 아들들에게 요구한 것으로 <장장본> 입언立言에 보인다. 따라서 13편이 82편을 토대로 재구성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손무는 축간의 이유로 전쟁을 기획하고 전개하는 병법의 공포를 무마하고 “13편으로 압축하여 음살陰殺의 천기天機”를 가두어 두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82편은 감추어지거나 폐기되어야 할 위험한 책이었다. 뒤에 음살은 13편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으나 唐의 이전李筌은 음살이 “음주살벌陰主殺伐, 주군을 숨기고 적을 정벌하는 것”으로 풀이를 달리했다.   
    82편의 편제명篇題名 배열은 내용의 올바른 이해 없이 가능하지 않다. 현대의 군사용어에 대입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고대 병서 용어는 양병과 용병이 혼합되어 있고 진법과 기동 배비 용어 역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전략, 작전, 전술의 층위가 섞여 있는 고대 병법의 특성상 같은 단어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문리의 범위에서 참을 수 있는 추정의 한도는 자의적이어서 이 책 안에서만 범례를 고정할 수밖에 없다. 81 편(預示 제외) 중 잔멸殘滅 41편을 제외하면 40편뿐이고 편제 순서를 가진 12편은 제목만 남아있어 28편만 내용을 알 수 있다. 더불어 편제의 순을 알 수 없는 편제명만 남은 잔문殘文이 20편이다. 따라서 콘텐츠의 알고리즘으로 12편, 또는 13편으로 분류되었음을 알기는 쉽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병법이 漢代에 이르러 장량계와 한신계로 나뉘고 이를 확인해 준 것은 당대唐代였다. 축간縮簡과 편제의 배열 재조합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며 음운을 통해 어느 정도 분류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의 전승이 기록에 의함보다는 암기와 구전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음운에 의한 편제의 분류에 오행이 차지하는 영향은 막대했다. 唐의 공영달은 오행을 배비시켜 “토는 궁宮, 금은 상商, 목은 각角, 화는 치徵, 수는 우羽이다”고 註했는데, 한자음 발음이 당나라 이전까지 한국어와 유사했을 거로 생각하면, 이는 “아설순치후”로 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오행 배속과 같았다. <홍무정운>과 <동국정운>의 음과 오행의 배치는 서로 일치하지 않고 이는 현재 음운학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이다. “나랏말쌈”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어의 상형적 표기나 “뜻”의 몰입 방법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82편에서 13편으로의 재조합에 작용한 요소나 유통한 사고思考 통로에는 음운뿐만 아니라 손자 13편의 다섯 가지 핵심 비교 요소(道天地將法), 천지인 3재才, 5 행行(土金水木火)의 순환과 생극生克이 작용한다. 13편의 최초 計편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를 행렬하여 계로써 비교하고 經之以五 校之以計”라는 문구가 후세의 주注에 의해 5사 7계로 잘못 연변 한 것은 손성연이 바로잡았지만 동방문자(한자)의 음운성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13편의 형성이 하루아침에 한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정음正音”을 확립하고 체계화하려는 후세의 노력에 의한 흔적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언어의 기록은 음에 의한 것이므로 13편 분류에 영향 요소로 판단하는 것은 타당하다.  
    66-67쪽
     
    장장본이 위서라면 “손빈병법”으로 변조된 30편의 대부분 문구가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1928년에 세상을 떠난 장루이지가 1972년에 발견된 죽간을 보고 베꼈을 리도 없다. 오히려 손빈병법의 잔멸된 죽간의 부분을 채울 수 있는 문리와 문맥에 맞는 단어를 장장본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고, 한예체漢隸體로 써진 죽간의 현대적 해석과 오류가 없다면, 손무     <손자병법>의 주요 문장과 사색의 연원이 장장본에 있음을 알게 된다. “손빈병법”이 재조再造되고 편수 번호가 주어진 상권 8편 “지보地葆”, 12편 살사 殺士, 하권 1편 십진十陣, 2편 십문十問을 제외하고는 모두 장장본에 들어 있다. 장장본에 없는 이 편수는 아마도 한신에 의해 정리된 “제안성간 89편”에 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4편은 유실한 82편의 어느 편수에 해당하거나 <제안성간>의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이 네 편 모두 문장은 다르지만 13편의 군사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245쪽
     
    <손자>의 반전 평화는 태생이 도교적 원리에서 온 장장본에서 연류했다고 볼 수 있다. 손자 13편 <행군편>에 “凡四軍之利,黃帝之所以勝四帝也”라는 구절에 조조는 황제 이하를 삭제한다. 전통적 해석은 “네 가지 군사적 이점을 안 것은 황제가 주변의 사제를 이긴 이유였다.”이지만, 다르게는 중화 인문(황제)가 주변의 신화적 존재들을 물리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황제는 물론 황건적의 상징물이고 조조가 토벌한 대상이었다. 이 문구는 송나라 태평어람에서 복원되어 현재 대다수 통행본에 기재되어 있다. “황제”는 분명 장장본의 흔적이다. 장각의 태평도에서 창천蒼天이 천인 감응의 漢나라이면, 황천黃天은 허황한 하늘이 아닌 누런 황토에 서 있는 백성의 나라였다. 도교가 인간 중심으로 변화하는 중요한 길목에서 병법으로 평화를 끌어내는 마중물을 남겼다.
    303쪽